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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우의 시

시를 위한 열린 마음 

--이종우의 시

채수영(시인. 문학비평가)

1. 시를 위한 기도
시가 무엇인가는 시를 쓰는 시인조차도 모른다는 데 동의 할 것이다. 이는 인간이 무엇인가와 등가(等價)를 이루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유로 접근하는 방법은 있다. 메쉬 아놀드가 “시와 종교는 같다”라는 비교에서 종교의 정의와 시의 정의가 상통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종교는 행동에 의해 선(善)의 지고(至高)점을 찾아 나서고, 시는 감동의 출구를 통해 지고성에 도달한다. 선과 감동은 투명하고, 아름답고, 순수하고, 오로지 깨끗함에서 보일 수 있는 세계에의 감동과 일치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영원한 기쁨이라면, 착한 행동 또한 아름다움이고 풍광 좋은 경치 또한 아름다움-- 시는 그런 감동의 정점에 있다. 이를 위해 찾아가는 길은, 자발성에 의해서 열리는 세계 혹은 보이는 세계가 되지만, 시는 지적인 작업이라는 데서 차이가 남는다. 때문에 시인의 작품에 창조라는 이름을 헌사(獻詞)하는 이유가 있다.
시는 머리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지적인 감동의 누선(淚腺)은 시에 어떤 경외(敬畏)의 마음을 갖는가의 여부에 따라서 시는-- 가슴을 통해 얼굴을 보인다. 정갈한 기도와 경외의 순수성 그리고 단순한 마음의 기도에서는 시가 보인다. 시는 그렇게 순수의 의복을 걸치고 다가오는 음성--시인의 고독과 시인의 순수는 곧 시의 잡티가 섞이지 않는 영원성의 이름과 맞바꿀 수 있는 가치의 이름이라는 뜻이다.
이종우의 시는 그렇게 시작된다. 드러냄이 없는 행동은 겸손이고, 맑게 고인 마음의 물길을 내는 고독은 시의 신에 다가갈 수 있는 가장 투명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과시와 과장과 에피소드로 일세를 풍미할지라도 허세의 풍선은 언젠가 공허의 벼랑에서 추락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시는 다만 조용한 그리고 감동을 전하는 메신저의 역할이면 그 시인의 임무는 완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를 구원의 친구로 삼아 온지 긴 세월이 흘렀다’(시인의 말)는 시인의 고백은 심사(深思)한 강물을 접하게 한다. 이종우의 시에서 풍기는 정감은 그렇게 다가왔다. 이제 그의 정신도(精神圖)를 구경할 계제(階梯)이다.

2.길 찾기의 여정
1) 삶, 영원한 숙제
인간은 살아있는 한 삶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길을 개척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 혹은 어떤 방법이 지선(至善)과 합리적인가의 문제 앞에서 답을 마련하는 일이 계속된다. 또한 삶의 문제는 자기와 타인과의 관계를 설정할 때, 이미 자기의 문제를 정립해야하는 일이 우선이면서 타인에 대한 배려를 예외로 할 수는 없다. 

헛됨을 몸으로 아노니
살아있는 날 어이 할거나

숨이 멈추는 날까지
무기력함에 빠질 수 없어
나를 세우고 아픈 몸을 세우고
이웃에 따스한 시선으로
다가설 수밖에.

헛됨을 몸으로 아노니
살아있는 날 어이 할거나

살날이 길지 않는데
어떻게 조화롭게 살고
풀리지 않는 문제를 확인하고
이 세상을 값지게 마무리할 준비를 하나.
살날이 길지 않는데.
<살날이 길지 않는데>에서

허무는 인간의 본질로 들어가면 맞닥뜨리는 문제이다. 무엇이 있는 것 같은 인생이지만 정작 하나하나 따져보면 아무것도 없는 빈손을 인지(認知)할 때, 삶의 허무는 크게 다가온다. 이는 누구에게나 같은 상징이면서 비유이지만 무엇을 위해 헌신하는 가는 선택의 문제이다. 다소 애매한 표현이지만 ‘헛됨을 몸으로 아노니’에서 ‘살아있는 날 어이 할거나’와 짝을 이루면서 살아있는 날을 ‘어이’에서 방법적인 문제를 거론한다. 다시 말해서 살아있음과 어떻게의 문제가 상관을 가질 때 다음 연의 의미--‘무기력함에 빠질 수 없어’와 ‘나를 세우고’ ‘이웃에 따스한 시선’으로 다가설 수밖에 없는 의도가 확연해진다. 또한 ‘어떻게 조화롭게 살고’ 이 ‘세상을 값지게’ 마무리할 준비를 위한 자세에서 이종우의 삶에 대한 뚜렷한 확립이 우선하고 있다. 행동은 신념이 정립된 다음에 나오는 양식이기 때문에 자기를 위한 룰은 항상 엄격하고 철저함이 되어야 하는 조건에서 이종우의 삶의 문제는 포옹에 근본을 두고 있다. 

즐거워야 한다 어차피 가야한다면 즐거워야 한다. 오래 살려는 욕심도 잘 살려는 욕망도 버리고 즐거이 살아야 한다 어차피 살 일이라면 즐거이 오늘을 맞고 내일을 가야한다면 저 산이 저 강물이 순리대로 살 듯이 살 일이고 몸이 성해야 하나니 싱싱한 산수를 닮아 오래 묶은 피를 토하고 새 샘의 향을 마시라.
<나에게>

사는 일에는 표정이 있다. 물론 사물에 대응하는 반응이지만 이는 싫고 좋은 마음이 일정한 얼굴을 만드는 작용을 하면서 살게 된다. ‘즐거워야 한다’를 강조하는 이종우의 마음은 낙관적인 생각으로 사물을 관조하거나 관찰하는 이유가 ‘어차피’라는 상황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어차피 살 일이라면’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바에야 즐거움이 행복의 조건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순리대로’라는 태도에서 즐거움이 잉태한다. 억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강물의 흐름--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이치를 터득한 사람만이 강물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고, 삶의 가치를 여기에 대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적거리(Aesthetic Distance)는 자기와 사적이고 공리적인 관심을 버린 허심탄회한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분리와 초연과 멸각이 있지만 허심탄회한 마음의 상태는 곧 순수함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이종우의 정서는 그렇게 투명함을 추구하는 것 같다.<숲과 새>나 <센티맨탈 여로>,<내 장기를 두지 않으리니>,<숲과 새>,<이별가.2> 등은 시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형상화한 정서로 두드러진 이미지를 담고 있다.

2) 시에 대한 소회
시인은 오로지 시로 말한다. 화가는 선과 색채로 음악가는 리듬으로 말한다면 시인은 언어를 재료로 자신의 사상이나 관념을 말한다. 물론 상징이나 비유 혹은 역설 등 시적 장치를 갖추고 시를 제작한다는 것은 매우 지난(至難)한 일이지만, 시의 언어는 긴장과 탄력 등 시가 갖추어야 할 위의(威儀)는 가장 고귀한 모습으로 독자의 감동을 자극하게 된다.

아무리 빛나는 시를 쓴데도
저 조그마한 들꽃보다 못하고
저 파릇한 신록의 숨결보다 못하니
시인은 무엇인가.

시는 생명을 꿈꾸지만
쓸 데 없는 손에 묶여
도공이 빚은 항아리만 못하고
어시장의 회만도 못하구나

언어는 죽어서 빛이 없으니
어찌 어둠을 밝히리오
언어는 멋만 살아서 거죽만 보이고
언어는 그 강한 힘을 잃었으니

시인이여 언어가 살아있는 시에
정념의 혼을 모아
시인이여 죽을 각오로 시를 쓰라
<나비와 인연>에서

자연은 완벽한 조화를 갖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기하학적으로 나타낸다. 아무리 잘된 인공물이라도 자연의 순리에는 미치지 못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에는 키를 낮추는 것이 진리이다. ‘조그만 들꽃보다’ 못한 것이 시인의 시(詩)라면 이는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시는 일정한 힘을 가질 수 있다. 이른바 좋은 시는 감동을 주고 --이 감동은 어떤 힘보다도 강한 지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시인은 필생의 작업을 위해 심혈을 기우리는 이유가 나변(那邊)에 있음이 아니다. 이는 이종우가 Paradox의 방도로 시의 가치를 강조하는 방법이다. 마지막 연에 ‘시인이여 죽을 각오로 시를 쓰자’라는 강조는 앞의 어둠을 제거하는 강조가 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를 씀으로 시인이 된다. 때로는 타작(打作)도 나올 수 있고 수작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일생을 시에 매진한다는 것은 시에 접신(接神)의 경지를 방문해야만 한다. 이 때 시는 얼굴을 내밀면서 시인의 노고에 보답하는 확실한 일이기 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시 쓰는 일은 신념(信念)이다. 누가 뭐래도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성(城)을 쌓고 성주가 될 때, 화려한 시의 신은 꿈꾸듯 다가오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3)허무와 이기
허무는 인간이 살아가는 도정에서 만나는 필연이고 벗어날 수없는 운명이기 때문에 존재자의 본질이다. 모든 성인들은 이런 허무의 이름에 탄식을 심었지만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기에 예수는 vanity를 탄식했고, '공허는 우리들의 추억과 무서운 장난을 친다'라고 말한 J.Conrad나 공자(孔子) 혹은 E.Glasgow 등 허무는 문학의 주요 관심사였으니 이는 인간의 근본을 숙고한데서 나온 말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허무란 인간의 유한을 느끼는데서 나오는 진실에 대한 깨달음일 수도 있고, 유한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내는 아픔의 탄식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든 인간의 생에 대한 본질이라는 점에서 변함없는 어휘일 것이다.

언덕을 넘어도 허무라면
허무의 판에 부를 노래를 찾으라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살아 있는 한 외치는 구호

언덕을 넘어도 허무라면
허무의 판에 진실과 진리를 찾으라.
<허무의 언덕>

언덕을 넘는 일을 살아간다는 의미로 바꾸면 생의 공허가 자리한다. 이는 살았다는 증거이고 생의 반응이기 때문에 공허는 오히려 자신을 인정하는 상징에 이를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고 오로지 살아있는 자는 허무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허무(Vanity)란 어휘는 허영과 같은 줄기에서 나오는 말이기에 생의 본질을 충실이 할 때--‘진실과 진리를 찾으라’는 말에 긍정을 보낼 수밖에 없다.
자기를 주장하는 것은 타협의 공간을 없애는데서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서로를 존중하는 것은 Eros--공존의 이름에 서야 한다. 물론 에로스에서 Agape적인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종교적인 세계에로 접근하는 일이지만 인간은 에로스--자타(自他)공존의 공간을 이루어야 한다.

네 이웃을 진정 사랑하느냐
대답이 없다

네 이웃을 진정 사랑하느냐
대답이 없다 

이 세상은 이기의 전장터여서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이
찾기 힘드니

십자가가 부끄럽다
<십자가가 부끄럽다>

종교는 다만 자기정화의 방편일 때 불편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기심과 코드의 칸막이에서 자기 것만을 고집하는 일에서는 차라리 종교 없음이 오히려 나은 지경이 되었다. 이는 자기비판의 기능이 상실된 이유가 될 것이지만 우리의 대부분의 종교는 그런 지경에 함몰되었다. ‘이기의 전장터’--종교의 상징이 세상을 덮고 있지만 오히려 불신과 불화와 시기와 질투가 난무하는 것은 자기비판이 무디어진데서 나오는 슬픔이다. 때문에 이종우는 ‘십자가가 부끄럽다’는 아픔을 토하는 이유--종교의 미명하에 패거리의식을 거부하는데서 나오는 고백이다. 정작 사랑을 내걸고 사랑을 외면하는 일은 죄악이 될 것이기에 이종우의 고백은 힘이 실린다.

난에 물을 주면서
그들의 뿌리는 보지 않고 늘
꽃만 기다린다

난은 난리리, 뿌리의 고통으로
그런데 나는 괜시리 난리다

꽃을 기다리며
내가 키웠다고, 내가 피웠노라고

하나의 밀알이 되기보다
수확하기에 바쁜 이
난을 보라
<난(蘭) 피우기>에서

뿌리는 본질이고 꽃은 본질에 대한 증거이다. 증거가 본질에 앞선다면 이는 잘못된 현상--꽃을 보기위해서는 본질인 뿌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앞서야 할 것이지만 인간은 그 반대의 기대감으로 난을 키운다. 이런 전도(顚倒)된 현상은 흔히 범하는 잘못이지만 사물의 통찰에서 비로소 이해되는 부분이다. 이시인은 사물이 깊이를 천착하기 위해 깊이로 가는 길을 내고 거기서 관념을 뛰어넘는 또 다른 공간을 시로 설정했다. ‘내가 키웠노라고 내가 피웠노라고’의 자랑을 앞세우기 전에 뿌리의 아픔을 생각하는 휴머니즘-- 이는 개성이고 시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같은 말을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해석, 새로운 의미부여가 시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4)열린 자연
사물을 바라보는 일은 외면(外面)을 먼저 바라보고 그 다음이 본질인 내부(內部)로 들어간다. 가령 나무를 보면 형상이 있고 그 다음에 나무에 속성을 이해하고 그 다음은 나무아래서 쉬고 가는 의식으로 전개되면 전자는 나무의 외면이고 쉬고 가는 고마움을 느끼면 나무에 대한 내면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자연을 바라보는 눈도 그런 단계를 거친다. 어떤 사람은 사물을 보는데 겉만을 묘사하고 어떤 이는 사물을 바라보는 통찰에 이른다. 가령 야성미의 여자를 표현할 때 Remy de Gourmon의 연작시 <냄새가 그려낸 시몽이란 여자>에<머리칼>은 23가지의 냄새를 추출했고 그 느낌은 건강, 소박, 야성미의 시골처녀의 모습을 표현했다. 이는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의 눈(Mind's eye)에 의해 가능한 일이다. 마음속에 눈은 세상의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길을 갖고 있음이다. 자연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는 가는 시인의 체험과 사상이 집약되어 나타난다. 이종우의 자연은 닫힌 것이 아니라 열린 눈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좀 더 친근함을 주는 것 같다.

그것은 더 할 수 없는 미학이요
견딜만한 고통이며
더러움 깨치려는 교훈이다

나무는 말하기 시작한다
포근한 날 온 몸 촉촉이 젖고
눈 방울 흘리며
나무는 대화를 한다 숱한 친구들과
그리고 숲가는 흰꽃 송이를 날리며
외치기도 한다

정토는 문제가 아니고
그 깨끗한 땅위에 사는
오직 사람의 문제이니.
<숲에 눈이 내릴 때>

나무를 사람으로 바꾸면 개방적인 사람 혹은 친근미를 줄 수 있는 다감한 사람으로 인지된다. 열려진 것을 소통이 전제된다. 이는 갇힘에서 오는 답답함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소통에의 신선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나무는 대화를 한다’에서 이종우의 자연은 섬세하고 미묘한 감수성을 동원하는 열린 공간에 미풍이 오가는 시원함이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숲가는 흰 꽃송이’ 날리며의 화려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음이다. 
동화(同化)는 세계의 자아화--시인이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여 그것을 내적 인격화하는 동화(Assimilation)는 자아의 욕망이나 가치관 혹은 감정까지도 자기와 같은 것을 만드는 공간--이것을 거치면 동일성의 세계에서 감동을 수반하게 된다.

어제보다 빛이 나는 산(山)
거기 숱한 생명의 소리가
바람에 묻혀 와서
내게 살아있나 묻네.
..........약......
그래서 그런 산에 촌부로 지내며
주경야독
현대판 안빈낙도를 노래하며
산빛에 가까워지는 게다.
<산빛>에서

산에 가까이 가면, 산이 되고 바다에 이르면, 바다 빛이 되는 일은 동화가 된다. 시는 일체화(Identity)라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기교가 필요하고 동화나 투사 또한 이런 일환에서 완성된다. ‘촌부’가 산에 살면 산이 되어야하지 바다가 되면 불행한 일로 점철된다. ‘산빛에 가까워지는 게다’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산의 속성과 가까워야하고, 산에 녹음과 가까워야 하고 이런 조건들에서 매듭이 없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의 동화에서 시는 즐거움을 줄 수 있다. 이종우의 자연은 열려진 공간으로 다가오는 자연이기 때문에 꾸밈이 없는 현상을 접하는 즐거운 비유인 셈이다.

5)직업
이 세상에 직업이 많지만 자기의 적성에 합당한 직업은 그리 많은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남을 가르친다는 일은 확실히 엄숙한 일이다. 왜냐하면 진리에 가까운 행동이나 실행을 기준으로 해야 하고--기준자(criterion)을 가질 때, 비로소 진리에 가까울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교사는 엄숙한 사명과 더불어 진리에 헌신하는 임무가 주어지는 --이를 실천하고 헌신하는 일은 희망과 꿈이 키워지는 일이다. 이런 직업은 비록 고난스럽고 어렵다하더라도 바람직한 일이 될 것이다.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직업 중에 보람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나태의 함정에서 열성이 부족하다면 자기의 직업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으로 정리된다.

먼 길이네 그대들에게 나무 한 그루
가슴에 심어주기는커녕
그늘 한 번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그대들 앞에 서네
아 먼 길이네 떠나야 하나 헛되고 헛된 말과
부실한 가르침 말만 무성하고 나의 만족에 싸여
허황한 문자만 나열하고 매여
속된 깃발만 흔들고
무엇으로 그대들에게 가슴 깊은
곳에 참 나무 그 뿌리를 내려
그윽한 향내 열매 맺게 하리
먼 길 그래도 추스리어
그대 앞에 서야 하나 언제
떳떳한 속과 겉이 같은 먼 길에 서려나
<사도(師道)>

사도의 길은 실행에 어려움 때문에--귀감이 된다는 것은 금욕과는 다를지라도 평범(平凡)을 벗어나는 일이기에 어려움이 따른다. 이를 자각하는 것은 그만큼 실천의 길을 가는 길 때문에 토로되는 감정이다. ‘헛된 말’ 그리고 ‘허황한 문자나열’에서 진실과는 다른 쪽을 바라본 후회의 마음이 아프다. 이런 고백은 번뇌의 갈등이면서 치열성을 갖는 직업에의 사명이다. 번뇌는 애착이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참 나무’에로의 성장과 ‘그윽한 향내’와 ‘열매 맺게’하는 일은 고통과 아픔을 수반하면서 이룩되는 성과물이 되기 때문이다. 이종우는 참된 사도의 길을 위해 고통과 아픔을 섞어 꿈과 희망을 키우는 농부의 역할과 같은-- 땀을 흘리는 인상을 준다. 

3.시의 향내는 어디로 가는가
시에는 감동이 있고 감동은 영원한 기쁨을 준다. 때문에 한 편의 좋은 시는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우선하는 평가의 개념으로 승화한다. 시인이 심혈을 기울이면서 시를 쓰는 이유가 감동의 창조에서 헌신하는 가치는 독자의 마음을 정화 혹은 순수의 상태로 전환하는 몫에 전부를 걸만한 가치를 갖는다. 
이종우의 시는 삶의 가치를 헌신에 두고 이를 실천하는 일에 가슴을 바치는 인상을 준다, 이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끝없는 길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나그네의 의식과 연결된다. 
허무는 인간의 삶에 벗어날 수없는 운명이라면 이는 비단 이종우만의 느낌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감수성이지만 시인은 이런 보편성의 감수성을 위해 자기만의 몫을 발휘할 때, 또 다른 공간을 확보하는데서 개성을 발휘될 수 있게 된다. 이종우는 명상적인 깊이로 방문하여 개성을 나타내는 시어의 특성을 내장한다.
이종우의 시에 자연은 닫힘이 아니라 열림이고 여기서 새로운 소통의 관계가 설정되고 신선감과 언어 탄력을 구비한다. 이는 시의 힘이면서 시인의 능력이 점검된다. 

모든 시에는 저마다의 향내가 있다. 직접적일 수도 있고 간접적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든 독특함이 드러나면 그 시는 성공적인 표정을 관리할 수 있고 내일에 꿈과 희망을 인도하는 시인의 임무가 미소로 답할 수 있게 된다. 이종우의 시는 그런 자리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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