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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인식과 그 증득

<특집> 원로 시인 구 상(具常)시인 탐방


탐방기

존재론적 인식과 그 증득(證得)

최 세 균(시인. 본지 발행인)

여의도 시범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서니 심산을 방불케 하는 녹음 속에서 칠월 하순의 매미가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선생님의 「신록을 바라보며」라는 시는 어쩌면 이 나무들이 봄을 맞는 걸 보고 쓰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겨우내 세상무대 뒤 땅 밑에서/움츠리고 살던 초목들이/아무런 요란도 수선도 떨지 않으며 // 저마다 새로운 봄 치장을 하고서 / 화사한 햇
발을 온몸에 받으며/서로가 염미(艶美)를 발산하고 있다. <신록을 바라보며>에서

엘리베이터를 탈 것도 없이 2층에 올라 왼쪽 복도 길로 가는 집, 다양한 화초가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관수재(觀水齋)' 다. 집안에 들어서면 이내 보게되는 觀水洗心(관수세심)이란 휘호의 액자가 말없는 메시지를 마음에 전해 온다. 
이번 방문에는 최운상 이사장과 주간 이종우 시인이 함께 했다. 특히 이종우 시인은 선생님과 교분이 짙은지라 시간 약속은 물론 집 안내까지 맡아 수고했다. 
선생님의 첫 인상은 경건함 그것이었다. 그는 붙들어 드리고 싶은 연로한 할아버지였으나 범접할 수 없는 구도자적 기품이 우리를 압도한다. 그러나 긴장을 계속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를 맞아주는 웃음이 너무도 안온하고 다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차를 대접받고 있는데도 애써 먹을 것을 더 내 오라고 하신다. 84세의 고령만으로도 힘겨운 일상일 텐데 폐를 절반 이상 떼어내는 수술을 받은 일도 있고 당뇨와 천식에 수족통증까지 겹쳐 고생하고 계시다는 말을 들은 바 있는 나로서는 송구한 마음을 금할 바 없었다. 94년도에 생의 반려자인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슬픔, 98년도에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일 등 심신의 고통이 지속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연한 모습을 하고 계시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시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문학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종우 시인의 질문으로 이내 대화는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뭐, 너무 감성적이라 할까요. 우리 문학은 존재론적 인식이 결핍돼 있다고나 할까요. 특히 우리 시에 있어 그 서정성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범신적이고 샤머니즘적이지요. 그런데 그 샤머니즘적 맹신은 물론이려니와 범신론적 초탈이 존재론적 인식의 추구나 증득에서가 아니라 그저 관념자체로 l해되고 수용되어 있다는 느낌입니다..."

1946년 북한 원산에서 시집 응향(凝香)에 '길' '여명도' '밤' 등을 발표함으로 필화를 입고 월남한 뒤 여러 시집과 산문집을 내다가 1986년 <구상 시 전집>이 발행되었는데 그때 그 책머리에 피력한 글에서 우리는 그의 시 세계를 좀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

나의 시는 그 출발부터가 우리 시단의 통념으로는 그 주제 면에서나 형상성 면에서나 이질적이었다고 하겠다. 단적으로 말해 자연서정이나 서경, 인간의 정한이나 심회를 시의 유일한 주제로 삼고, 또한 외형적 줄 떼기나 운율만을 시의 음악성으로 여기고, 시각적 심상만을 추구하던 우리 시단에서 존재에 대한 인식이나 역사의식, 나아가서는 형이상학적 세계를 주제로 하고 한편 그 표상에 있어서도 외재적인 운율이나 시각적 심상보다 내재적인 선율이나 논리적인 심상을 나는 추구해 왔던 것이다.
<구상 시 전집 책머리에 몇 마디>에서

선생님의 시적 태도는 철저하게 존재론적인 기반 위에서 미의식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즉,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이 없는 감성을 배제하고 역사의식에 기초하지 않는 생경한 지성이라는 것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태도가 구체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시집 <초토의 시>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새로운 시도와 추구로 말미암아 때로는 비시적(非詩的)이라는 평을 들어가며 외로운 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걸어 온 분이 바로 구상 선생님이다. 

"모든 것이 세계화되어 가고 있는 추세에서 선생님의 작품들이 좀더 많은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으면 하는데요 "

"아니, 이미 불란서, 영어, 독일, 스웨덴 등에서 번역판이 출판됐습니다. 그런데 나는 한번도 내 시를 번역, 출판해 달라고 기웃거려 본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가령 첫 번역인 불어역 <타버린 땅>은 그게 1982년인가 당시 세계 펜클럽회장인 불란서 시인(르네 다부니엘)이 한국에 와서 나를 만나기도 전에 신문기자들과 회견하며 우리는 구상의 시를 주목한다면서 이번에 그와 시집 번역을 숙의하겠다고 해서 불란서대사관을 통해 면접을 요청하기에, 마침 가톨릭 신부였다가 환속하여 그 결혼식에 내가 주례를 선 로제 르베르리에(한국명 여동찬) 당시 외국어대 교수와 함께 만나서 그 시집을 번역, 출간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번역자 르베르리에 교수는 이제 은퇴하여 고국에 돌아가 살면서도 어찌나 나의 시를 사랑하는지 자기 집안 묘소에 묘를 만들고는 나의 시 <꽃자리>를 비명으로 새겨 넣고 이즈막 그 사진을 찍어 보내왔어요."

앉은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최근에 내신 '인류의 맹점에서'라는 시집을 보노라면 선생님 시는 기독교적이면서도 불 교적인 면이 강하게 느껴지던데요?"

"나는 대학시절 종교학과를 전공했습니다. 일본은 불교나라라 커리큘럼의 50%가 불교 경전의 강의였지요. 그래서 학점을 받기 위해서 3년 동안 불교 공부를 했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몇 권의 책을 찾아서 미당의 "내가 돌이 되면" 이라는 시를 읽어 주시었다. 그리고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등, 이것은 윤회사상이지요.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은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 천사는 영원한 천사, 인간은 영원한 인간인데, 저러한 범신적 윤회사상은 인간 존재의 특수성이 사라지고 윤리의식도 희박해지지요. 그래서 미당은 어떤 대통령후보를 지지하는데 그 사람의 미소가 아름다워서 그를 찬성한다고 했지요. 그렇듯 어떤 존재파악을 윤리적이나 역사적 당위성에서 판단하기 보다 그저 심미주의적이랄까 그렇게 되는 거지요."

선생님의 시는 견고한 기독교적 신앙을 기저로 광범위한 정신세계를 포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건국신화를 비롯하여, 전통문화, 한자문화권의 고등교양, 자연탐구는 물론, 선불교적 명상과 노장사상까지 포괄하는 한편, 이 모두는 항상 기독교적 구원의식으로 통합되고 있다. 역사의 의미와 인간 존재의 궁극을 동시에 포용코자 하는 그의 시 세계는 항상 절대적 신앙의 경지로 귀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노벨문학상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글세, 주제나 제재의 보편성도 문제지만 일본 등에서는 그 수상운동을 맹렬히 하였다고 듣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번이나 추천되어 세 번 모두 예심을 거친 바 있는 선생님의 작품들이 마침내 노벨상 수상작으로 결정되는 날이 오려면 그만큼 우리의 국력도 강해져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북 칠곡에 구상문학관이 세워지게 되었다는데요?"

"나는 대구 피난 시절 영남일보 주필겸 편집국장과 효성여대 교수로 있을 때 대구에 이웃인 낙동강변에다 서재와 아내의 병원을 장만하고 그곳에 한 20년 살았고 호적(월남자)도 그곳에다해서 지금 본적지가 그곳이지요. 그리고 집 앞이 강가라서 내 사랑채 이름도 관수재가 되었지요. 그러나 나는 책만 2만 5천여 권과 소장품 100여 점 보냈지만, 그 집과 대지까지 칠곡군에서 사서 새로 건립을 하여 9월에 개관예정이라지만 아직 가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건강 부실로 그 개관식에도 참석할는지 시방은 의문이에요."

"선생님의 아끼시는 시작품을 꼽는다면 어떤 시인가요?"

"글쎄, 여기 <오늘>이라는 시가 새겨진 카드가 있는데 하나씩 드릴게요" 하며 2002년 연하카드를 나눠주셨다. 그리고 그 시 끝에는 월간 문학사상 2001년 10월호에 발표되었던 것이라는 소개도 있었다.


오늘도 신비(神秘)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

"그리고 내가 천거할 연작시를 꼽는다면 '그리스도 폴의 강'을 들겠습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그리스도 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리스도 폴은 5세기경 스페인의 성인으로 그는 젊어서 깡패였는데 그 언젠가 그의 두목과 함께 어느 강가에 나갔다가 한 은수자(隱修者)의 집에 찾아갔다. 그런데 두목은 그 집에 걸린 예수의 십자가를 보고는 '저 자한테는 못 당한다.'며 줄행랑을 쳤다. 그래서 그리스도 폴은 그 은수자에게 '어떻게 하면 저 강자를 만날 수 있는가?'를 묻자, 그 은수자는 여기 강가에 머무르며 사람을 업어 나르다 보면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시키는 대로 날마다 사람을 업어 건네다가 세월이 흐르고 흐른 어느 날 밤 한 어린아이가 와서 강을 건너달라기에 무심코 업고 거너던 중, 그 아이의 무게가 천근만근 무거워져서 간신히 강을 건너 모래밭에 내던지듯 하고 쳐다보니 거기에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사랑의 화신 예수의 발현을 보게되었던 것이다.. 그 그리스도 폴의 연작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스도 폴! / 나도 당신처럼 강을/ 회심의 일터로 삼습니다. // 허지만 나는 당신처럼/사람들을 등에 업어서 /물을 건네 주기는커녕 / 나룻배 만들어 저을 / 힘도 재주도 없고
<그리스도 폴의 강 프롤로그>에서 

"이렇듯 연작시를 쓰는 이유는 사물의 다양성이나 다면성, 또 복합성 때문이지요. 그런 사물의 실재(實在)를 응시, 파악하려고 쓰는 것이지요. 또한 그리스도 폴이 깡패였던 것처럼 나도 정신적 깡패였어요. 나는 젊어서부터 저항정신이 강해서 해방전후, 그리고 6.25전란, 이 승만 정권 때도 민권투쟁에 앞장서서 <민주고발>이란 사회평론집도 내고, 엄상섭, 전진한 같은 분들과 함께 시공관에서 민권투쟁강연회도 하고 그래서 남한에 와서도 옥고를 치렀지요. 그 뒤부터는 일체 현실경영에서 떠났지만 말입니다."

사회의 부정과 불의, 부조리를 고발하되 그 고발이 자기 참회로 귀결되는 성찰의 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존재론적 기반 위에서 미의식을 추구하는 구원의 시로 한 시대를 대변했던 노시인의 고백 속에서 읽게되는 의로움과 진실함은 처절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이야기 도중 전화가 왔다. 어느 단체에서 무슨 요직을 부탁해 온 것 같다.

"여기는 글 쓰는 사람 집입니다. 현실비판은 좀 해왔지만 현실적 직책은 맡아본 적이 없 구요, 또 나이도 이제 80중반입니다."
참으로 정중한 인격적 거절이다.

"문학하는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은?"

"불교에는 기독교의 10계명처럼 십악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에 망어(妄語)와 기어(綺語)의 죄가 있는데 망어는 거짓말, 기어는 비단 같은 언어로 기만하는 말을 의미하는데, 이걸 종교가와 문학가가 제일 많이 범한다는 것입니다. 이걸 자꾸 범하는 사람은 무간지옥(無間地獄) 즉, 쉴새없이 형벌을 받는 곳에 떨어져 혀가 만발이나 빠지는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즈막의 시인들은 시를 말의 화장술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이덱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지요. 사고나 감동을 언어로 하지 않습니까?. 언어와 사고는 하나입니다. 지금 우리가 저 바깥 하늘을 잿빛이라고 하였다가, 젖빛이라고 한다면 이 형언의 변화는 곧 언어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고와 언어를 이원적으로 생각한다 이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말을 더듬는 사람이 더 신실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비단 같은 말, 말의 치장만의 시를 무정란(無精卵)의 시라고 부릅니다. 즉 감동을 부화시키지 못하는 시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국관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천국은 존재의 궁극적 완성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신비에 속한 것이지요. 우리의 나자렛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맨 마지막 말씀이 '아버지, 제 영혼을 당신께 맡깁니다.'라고 했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는 죽음 후에 어떤 변형에 관해서 즉 우리가 시공을 초월해서 완성되기 전까지는 그 변형의 상태에 관해서는 모른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한 가지의 질문마다 간곡한 설명을 아끼지 않으시는 선생님. 그리고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최근에 나온 시집을 한 권씩 선물하셨다. <두이레 강아지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시는 바로 나 들으라고 하나님께서 구상선생님을 통해 주시는 말씀이 아닌가 싶었다. 그냥 주셔도 되는데 첫 페이지를 열어 책마다 서명을 하신다. 수전증으로 고생하시는 손에 쥐어진 펜이 한없이 떨렸고, 두 자의 이름을 다 쓰는 동안의 시간은 마치 등산가가 가파른 암벽을 오르는 시간처럼 치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세 권의 시집에 모두 친필 서명을 하셨다. 선생님의 이름이 석자가 아닌 것을 이 때처럼 다행스럽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모쪼록 건강하시기를 소원하며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관수재>를 나오면서 나는 이 땅에서 존경받아 마땅할 분으로서 시인 구상 선생님이 계심에서 오는 행복감을 가슴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주차장을 에워싼 나무숲에서는 여전히 매미가 삼복의 하늘을 가르며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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