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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상(具常)의 시적 성과 일고(一考)

구상의 시세계

구 상(具常)의 시적 성과 일고(一考)

이 종 우

시와 시인의 인격이 하나가 되어 시어가 생명을 갖게 된다면 소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단에서는 재능과 인품을 하나의 선상(線上)에 놓지 않고, 재능이 뛰어나면 그의 인격의 결함이나 과오를 크게 문제삼지 않는 듯 하다. 
그러나, 시인의 경우 구 상이 말하는 바, '장인적 기능'과 '사제적(司祭的) 기능'의 조화가 필요하다는데 동감하는데 우리의 시는 유감스럽게도 언어적 표현의 재능인 장인적 기능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인품을 바탕으로 시적 진실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에 있어서도 진실된 삶과 인식, 그 추구의 결핍을 느끼게 한다고 본다. 
시가 정신적 수양과 삶의 성찰과 사회에 대해 깨어있는 의식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두 기능의 조화는 시인이 추구해야 할 세계로 구 상 시인은 그러한 시인의 사명을 충실히 실천해 온 몇 안 되는 시인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면모는 그의 여러 시편에서 확인되며 특히 그의 시선집 <말씀의 實相>(1980)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시<하루>(이후 <오늘>로 개제)에서는 그의 실존적 삶과 영원의 추구를 조화롭게 보인 시의 하나이다. 현실의 실상을 진지하게 반성하고 성찰하면서 '연탄빛 강에 합류'하는 사회 비판과 그 인식 그리고 '영원한 푸름'을 추구하고 기대하는 것은 '영원 속의 오늘'을 조응하는 것이 되며, 이 시는 적절한 비유의 언어가 되고 있다. 이는 시 한편에서 전체적 비유를 이끌어 내는 탁월한 시적 구성을 보인다 하겠다.
그는 <영원>속에서 현존을 인식하는 것은 이미 지적되었듯이 전일적(全一的) 추구라 하겠고, 자신과 사회의 반성과 성찰은 현존의 삶이 구원에 닿을 수 있는가와 연결되며 이는 그의 시의 근간이라 하겠다.
그러한 면에서 그의 시적 성과를 논의할 충분한 근거를 갖는다고 보며 우리 시에 있어 뚜렷한 시적 성과를 보인 시인의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고구(考究)를 그의 폭넓은 문학세계중 시의 일부를 가지고 시도하고자 한다.


(1) 보편성의 획득

20세기 대표적인 시인으로 평가되는 미국 출생 영국 시인 엘리어트(T.S Eliot)는 일찍이 '시는 개성의 표출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라 했는데, 문학에 있어 개성의 보편적 승화를 강조한 말로 들린다. 시인으로서의 구상은 자신의 삶의 표백을 통하여 인간 삶의 문제에 이르고 사회의 문제에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나아가 늘 초월적 존재를 인식하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한 그의 시적 표현은 여러 시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명(無明)의 백태가 벗겨지며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萬有一切)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이적(異蹟)에나 접하듯 
새삼 놀라웁고 <말씀의 실상(實相)> 1 - 2연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無力)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敗北)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제자들의 배반과 도피 속에서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그분이 홀로서 가듯> 2연

시방 세계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다. 
그 칠흑 속 지구의 이곳 저곳에서는
구급을 호소하는 비상경보가 들려온다.

온 세상이 문명의 이기(利器)로 차 있고
자유에 취한 사상들이 서로 다투어
매미와 개구리들처럼 요란을 떨지만
세계는 마치 나침반이 고장난 배처럼
중심도 방향도 잃고 흔들리고 있다. <인류의 맹점(盲點)에서> 1 - 2연

위 시들에서 보듯 세상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으로 새 날을 맞이하고, 세상살이의 어둡고 험난함을 인식하는 비판의식과 그 극복의 전망은 우리가 잊고 지내기도 하지만, 인간이 찾아야 할 영혼을 부러 일으킨다. 인용시만이 아니라 도처의 시편에서 그가 삶의 성찰과 현실 인식 그리고 인간의 영원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이 잊기 쉬운 또는 간과하기 쉬운 내면을 일깨우는 일로 보인다. 또한 연작시 <강>이나 <까마귀>의 근저에도 그리고 자전적 시집 <모과(木瓜)옹두리에도 사연이>(1984)에서도 그 시적 여정과 아울러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늘 제기하고 있다.
시적 표현에 있어서 그의 시는 일반적인 시와 달리 다소 진술적이라는 지적도 없지 않으나, 시 한편 전체를 보면 그것은 진술이 아니라 대체적으로 비유의 덩어리로 보인다. 차분히 그의 시를 음미하면 감동의 물결이 인다. 그러한 면에서 그는 이 땅에 남을 시를 쓰고 있다고 본다. '말의 화장실'이나 '무정란의 시'는 시가 아니라 넋두리이다. 그가 말하는 바, 말의 등가량의 진실이 없이 감동은 없으며, '존재의 집'인 언어가 사물에 대한 천착 없이 우리의 정서나 사상이 하나가 될 수는 없다. <인류의 맹점(盲點)에서>, <가장 사나운 짐승>은 인류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그의 보편적 세계의 추구에 대한 한 증거이다. 그가 <홀로와 더불어>서(序)에서 '어디까지나 인류의 보편적 차원에서 시를 써 왔다'고 함을 보이는 것이다.
필자가 보아온 바, 그의 시는 국내의 폭넓은 독자에게 쉽게 그리고 깊이 있게 감동을 주고 있고, 80년대 중반 불역(拂譯) 이후 꾸준히 세계 여러 말로 번역 소개되어 그들 독자의 공감을 얻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우리의 인식 세계를 잘 표출함은 물론 번역을 통해서도 인류의 보편성을 획득함이고, 이것은 인간의 근본적 문제를 제기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러한 것은 그의 인식의 넓이와 깊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국내외의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은 다시 말하거니와, 인간의 내면에 잠재한 보편적 의식을 일깨운 것이라 하겠다.
인간의 보편적 정서와 사상을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이러한 작업에 익숙해져 있고 다시 말해 삶의 자연스런 부분으로 드러나며, 이는 한국시사에서 보기 드문 시적 성과의 하나로 남을 것이다.


(2) 시와 삶의 전일적 추구

무성한 나무를 보면 그 나무의 아름다움이나 그 열매의 유익은 바라보나 그 보이지 않는 뿌리의 깊음과 그 지난(至難)을 생각하는 이는 드문 것 같다. 노자(老子)가 말한 '구층탑도 한 삼태기의 흙에서 이루어짐'을 시인에게 원용하면 감동의 시편은 시인의 여정 속의 여러 체험에 그 성찰, 거기에 따르는 고통과 승화 또한 그 인식의 지속적 연마에서 가능하리라.
구 상의 전일적 추구는 여러 평자들이 말하는 바로 이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 볼 수 있겠다. 먼저 그의 삶과 시의 연관을 간략히 살피고 가고자 한다.
그는 연보에서 보듯 남북 분단과 그 이데올로기적 분열상을 남북한 모두에서 직접 체험하였고, 6. 25 동족상잔의 아픔을 전투의 현장에서 생생히 목격하였으며, 이 땅 초대 이 승만정부의 독재에 맞섰었다. 그러한 과정은 그의 초기 시 <여명도>, <초토의 시(15편)>, 그의 논설 <민주고발>에서 볼 수 있고, 이는 역사적 증거로 남는다.(졸고 <시적 진실과 종교적 자유> 참조) 문제는 소위 개발 독재시대에 '그는 왜 침묵했는가'가 흠이라면 흠이겠는데, 그는 침묵을 하고 항거는 하지 않았으나, 벼슬을 하거나 영화를 누리지 않았고(문인 중에는 벼슬이나 거수기 노릇을 한 이 적지 않았다.) 멀리 이국 하와이에서 오랫동안 한국문학 등을 강의하였다. 그가 쿠테타의 주역과 독재자와의 연분으로 그 이전에 보였던 저항정신을 지속하지 않은 것에 돌을 던질 자는 거의 없다고 본다. 이 정도로 그의 '털어서의 먼지'를 매듭짓고, 또한 그것은 그가 인간적 관계에서도 전일적 추구를 보이는 것이며, 그가 군부 독재 시기에 준엄한 포효와 예언적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그 일환으로 보인다. 시집<까마귀>(1981), <저런 죽일 놈>(1988)은 그 사회적 비판과 준열한 정신의 표출이었다.
그의 전일적 추구에 대해 성 찬경은 <구상의 시세계/영원속의 현존(現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 상은 시의 시선 '관심'을 결코 현실에서 유리시키는 법이 없다. 그러나 그 현실을 단순한 현실에 국한시키는 일이 없이 늘 '영원'의 관점에서 파악함으로 해서, 다시 말해서 현실을 '실존적'으로 심 화시킴으로 해서 현실이 그 근원에로 향하는 깊이를 갖게 된다. (중략)
그 의미 또한 그러한 일들과 '영원'과의 조명에서 얻어지는 심연(深淵)이 되어있음을, 다시 말해서 생각과 명상의 깊이가 종교적인 차원에까지 가 닿아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가 현실과 영원을 동시에 바라봄은 그 추구하는 세계가 시와 시인을 분리할 수 없는 경지로 나아간다. 그만큼 언어와 생활이 하나로 묶여지고, 시속에 인격이 부여되어 살아있는 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윤리와 절대자 앞에서의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있다. 이는 전일적 추구의 한 단면이라 하겠고, 말 따로 행동 따로가 아니라 하나로 되는 길이기도 하다.

(3) 현존의 형이상적 승화

구상의 여러 시편에서 볼 수 잇듯이 '영원 속의 오늘과 그 현존'과 '현존 속의 영원의 추구'라 요약해도 큰 무리는 아닐 듯하다. 이는 현존과 영원의 조응(照應)으로 그가 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세계의 표출이다.
그는 우리 시에 감성 위주의 언어가 범람하고 존재론적 인식의 결핍이 보인다고 지적하는데 시가 서정성이나 언어의 감각적 표현에 머물고 그 철학적 세계를 갖지 못 할 때의 한계와 항구성의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그가 미당의 시 <문둥이>를 예로 들어, 무속성이나 범신론적 심미안에서는 진정한 구원이 없다고 보고, 더구나 오뇌의 끝에서 나온 것이 아닌 언어의 결합에서는 진정한 시가 나올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현존의 인식과 영원의 세계에 대한 진지한 탐구 없이 언어에서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 핀들 그 향이 얼마나 가겠는가 말하는 듯싶다.
'현존이 영원의 한 부분'이라는 인식 또한 앞 서 본 그의 전일적 추구와 연결되며, '그 분이 홀로서 가듯' 현실에 바탕을 둔 그의 형이상적 추구는 김 봉군이 지적하듯 '시와 믿음과 삶의 일치'와 '존재론적 물음'과도 연결 지을 수 있겠다. 아울러 '시와 신념의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그의 철학적이요, 가장 근원적인 삶의 문제에의 접근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시는 도덕적 해이 시대에 인간 심연의 분출로 정치적 사회적 등 물리적 힘에 양심의 문제를 제기하고, 인간성의 확인을 보여주는 것도 형이상적 세계 추구의 연장일 것이다. 이는 문학이 인류의 구원의 빛이 될 수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는 또한, 종교의 높은 벽을 허무는 신령한 지선(至善)의 세계에 닿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종교 시인이다. 이렇게 말함은 그가 종교에 치우쳐있음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궁극적으로 사랑에 머물지 않고 그 실천에 있다 할 때에 그의 형이상학적 축의 일면으로 시적 진실을 보이는 것이다. 그는 좁은 세상에서 보다 큰 세계를 인식하고 이를 시로 표출했다는 것은 구원(救援)의 모습으로 비친다.
그의 시화(詩話) 및 연작시 <그리스도 폴의 강>은 그것을 잘 보이며, 세상의 다면성을 인식한 결과이다. 그가 말한 바 '인간의 내면의 신비를 깨닫기 어려워' 수도(修道)내지는 수덕(修德)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형이상적 승화라 하겠다. '강'의 응시를 통해 '그리스도 폴'의 세계에 닿으려는 것은 그가 말하는 바 '현존 속의 영원, 오늘 속의 영원'에 깊게 뿌리내려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동서양의 철학적 기반아래 찾은 영혼의 샘이라고 하겠다. 아울러 그는 인간의 '수치'에 대한 인식을 제기하여 그의 내면적 세계를 엿보게 하였다. 그러한 그의 여러 인식의 세계는 우리 시사에 보기 드문 궤적을 그리며 시적 성숙과 그 방향을 제시한 중요한 의미를 띤다 하겠다.


(4) 폭넓은 세계의 인식과 시적 실천

구 상이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유교를 포함한 불가(佛家)의 세계, 노장사상 그리고 20세기의 철학을 두루 섭렵함은 그의 시와 평론 등 그의 여러 저작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의 다양하고 넓고 깊이 있는 생의 체험은 그의 인격의 고결과 더불어 그의 시세계가 가히 세계적(universal)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그의 전(全)생애적 바탕에서 우러나오는 세계의 의식은 한국 지성사에서 드문 일이다. 
이를 기저로 한 그의 시업(詩業)은 한국문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시론집이라고 할 <현대시창작입문>(1988), 수상집<실존적 확신을 위하여>는 그의 인식의 넓이와 깊이를 대변하고 있다. 그 인식이 시에 용해되고 표출됨은 그의 시적 실천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 논의는 다음 논고로 미루며 그의 시적 성과는 노천광처럼 <강> 연작시 등 여러 시편에 널려있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위에서 짧게 살펴 본 구상의 문학은 한국 그리고 그 너머의 세계에 닿아 있다. 그리고 그는 필자가 접한 수많은 시인 중에서 한마디로 대가(大家)적 면모의 시인이다. 이 시대에 살아있는 대가를 가까이 대함도 행운이요, 행복이다. 이 글은 그의 시적 성과를 간략히 살펴보았으나 미흡하지 짝이 없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또한 그의 문학세계를 아울러 보는 것도 그가 평생을 문학에 바친 만큼이나 지난한 일일 것이다. 더욱이 그에 대한 평가는 솔직히 우리 사회가 선진에 이를 때 더욱 공평하게 이루어지고, 쉽게 다가오리라 본다. 이 글이 보다 넓고 깊게 고구하지 못함을 필자의 능력부족과 시간 그리고 지면상의 문제로 돌리며 참으로 겉 핥기의 일고(一考)를 맺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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