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山)111번지 야산(野山)은 포탄 껍질과 먹다 버린 깡통으로 즐비했는데 우리의 형제들은 상(傷)한 터를 닦으며 태평양(太平洋) 건너온 밀가루, 우유가루로 끼니 채우며, 한 치 뜨락에 살아남은 그 재래종 난초 잎의 시퍼런 날을, 빈곤(貧困)한 어른과 아이가 싸울 때에도 거치른 빈 들을 사나운 개들이 떼 지어 핥을 때에도 지친 마음, 햇볕에 쪼일 때에도 그 재래종 난초 잎의 시퍼런 날을 날마다 바라보았지.
씽씽하던 솔잎 모아 아궁이에 숭숭밀던 그을린 벽(壁)에서 꿈을 그렸지, 봉선화 하나 손톱에 닿으면 물드는 그 환한 빛깔로 뒷전에 숨은 빗줄기를 잊었지. 술래를 잡으려는 한 떼의 아이들은 그 밤을 한껏 뛰어 다녔고, 서울 변두리 그 논길을 아낙들은 한 모금 식수(食水)를 위해 오리(五里)를 걸으며 이 땅에 지나쳐 간 설움을 행주치마에 적시던 그 때. 이국풍(異國風)의 바람이 스친다. 환한 건 하늘의 빛. 누가 그 대, 아이에게 샘솟은 희망(希望)을 부었든가, <산새알 물새알>*의 부드러운 시구(詩句)들이 시끄럽던 하루를 재워 줄 때에도, 그 때의 아이들은 꿈을 알지 못했다. 두드러기 나던 속살을 만져줄 이는 춥던 겨울 처마끝 고드름이었을까.
포화(砲火)소리는 아직도 살아 있다. 지나간 순간에 목이 메어서도 아니고 우리 아픈 맘을 들치려는 것도 더 더욱 아닌, 아득한 포화(砲火)소리 들리는 새벽.
그 때 잃던 새 살은 불빛으로 반짝이는 도시(都市), 풍성한 식탁, 따스한 옷깃 그 어디에 숨어살까. 산(山)111번지는 미래(未來) 아파트 단지. 잃은 것은 보이지 않는 새벽이여.
二. 난민촌(難民村) 그 이후(以後)
스무 여 해 하루도 빠짐없이 살아온 나날. 몇 해는 목을 가르던 분열(分裂)로 쓰디 쓴 삼 백 리(三百里) 강(江)을 건넜던가. 돌아온 마당 구석구석은 보이는 것 모두가 새롭기만 한데, 빗길에 밤을 새던 오누이들은 먼 길 저어 모랫벌 길로 떠났고 강냉이 가루도 쌀알 사랑 낳던 낯익은 연인들은 보이질 않는다.
동굴(洞窟)에서 제(祭)올리고 뒷간에서 속닥이는 음성으로 외치는 변화한 거리, 고루한 손끝은 피를 쏟는다. 보이지 않는 폐허는 무서운 포성(砲聲)으로 온 몸에 부딪치고, 배부른 난민(難民)은 그 때의 이 땅을 잊고 사는가.
새벽마다 잡힐 듯한 우리의 꿈을 쫓는 이 상품(商品)이 가득한 방(房) 한 구석에라도 곱다란 아이의 마음을 키우며, 별 초롱하듯 변함없는 하늘과 이 낯익은 거리에 묻힌 발자취를 새기며 밤을 보내는가.
오수(汚水)로 흐르던 냇가도 지루함 없이 보냈거든, 새움 트는 계절은 길지 않으리니, 살아나는 산수(山水)와 닮게 먼 바람과 부딪쳐 흔들릴 때에도 어른과 아이를 속이는 장막이 쳐질 때에도 살아나는 산수와 닮게, 새벽이면 난민(難民) 동구(洞口)의 거리에서 숨길 것 없이 가슴을 펴고 이 땅에 사는 무언(無言)의 향(香)을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