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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살아있는 시를 위하여> 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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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自序) 

이제 불혹(不惑)에 접어들고 비재(非才)에 매달린 지 스무 해.
무명(無名)에 익숙하니 무슨 명예와 문운을 덮어 쓰리오.
그렇다 하더라도, 시가 일생을 걸머지는 작업이 되기 위해서는
나의 하루 하루의 삶이 시다와야 하는데, 수신으로서의 혼(魂)과
보다 큰 뜻을 펴는 정신으로서의 시가 되기 위해서는 삶에 향기가 있어야 하는데,
나의 삶 어디에 존재하나. 그 향을 찾아 이 시대 살아있는 시를 위하여
이 시집을 내놓는다.

시는 장식과 새로운 수사가 아니며, 우리의 삶이 생리적에만 머물지 않으니,
배설만도 아니다. 시는 피와 땀이 서린 흔적이며, 그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정신의 울림이다.
그래서 혼탁한 흐름에서도 불변하는 인간됨을 가능케 하는 그 무엇,
간략히 그 사람됨을 이루는 진리, 그것을 지향하고자 한다.
언어로 인해 삶의 미망(迷亡)에 들어서는 허위와 기증을 배격하고, 실천 없는 언어의 마술을 거부한다.
나의 주장이 여기 이 시편에 다하지 못하나 대기만성의 과정으로 여겨본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별들에 감동해 왔고, 또 얼마나 많은 스러지는 별들에 아쉬워 했던가. 그래서, 끝가지 완결은 보지 못하더라도 피와 땀을 흘리면서 최후의 모습으로 향해 가고자 한다.

이 삶이 어질게 살면서 어리석게 행세함도 아니요, 그저 시는 내 안에서 진실되면 되었지 그 진실을 발벗고 나서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그 진실의 목소리가 이 산하를 째렁째렁 울릴 날도 아예 기대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진실을 쫓으리라고만 생각해 온다.

시가 보다 한 단계 승화하기 위해서 혜안과 날카로운 붓끝이 살아있어야 하는데
나의 시는 얼마나 찌들어 있는지 사뭇 두렵다. 내일은 자신을 갖으리라 다짐하던 날이 어이 한 두 해이었던가. 그러함에도 생명이 태어나는 이 순간에 나에게는 무한 책임이 주어지고 있다. 헐벗은 혼으로 헐벗은 혼들을 감싸면서, 이 시대의 살아있는 시를 위한다 하면서도 시구다운 시구도 없는 90년대의 넋두리에 무수한 비판의 화살 꽂아주시오.

1995년 2월
중평재(中平齋)에서
이 종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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