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과 비평

종군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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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이 20년 동안 울부짖는 절규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정부가 종군위안부 배상에 책임이 있다”는 헌법제판소의 결정까지 무시할 것인가?

2011년 12월 14일, 바로 오늘이 1937년 7월 7일 일본제국이 중국을 침공하면서 벌어진 태평양전쟁 때 강제로 종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運 좋게 살아 돌아온 234명의 위안부 할머니 중에서 지난 20년 동안에 171명이 숨지고 지금은 63명만이 남아있다. 생존해 있는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평균 나이는 만 86세. 지난 5년간 매년 10명 정도가 태산 같은 恨을 가슴에 품고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고 있다.

지난 1992년 1월 8일 수요일, 혹한의 추위 속에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종군위안부 할머니 30여 명이 "일본 정부는 정신대 희생자 위령비를 건립하라"는 등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그 당시 할머니들은 방한하는 미야자와 일본 총리에게 일본 정부차원의 공식 사과와 피해 배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일본 총리가 말로만 하는 사과뿐이었다. 할머니들은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 모여 집회를 이어나갔다. 그로부터 19년 11개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김없이 열린 수요 집회가 오늘로서 1000회를 맞았다.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분노와 절규 소리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일본의 성(性) 만행을 고발하는 마당으로 급부상했다.

1991년 8월 종군위안부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에서 “그동안 말하고 싶어도 용기가 없어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일장기를 보거나 정신대의 '정'자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립니다”고 회상하면서 김 할머니는 “17세 때 일본군 종군위안부로 끌려가서 겪었던 끔찍한 기억을 털어놓았다. 그 당시까지도 일본이 종군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잡아떼던 시절이었다. 김 할머니의 생생한 증언 덕분에 역사의 암흑 속에 묻혀버릴 뻔 했던 사실이 태평양전쟁 때의 종군위안부의 만행이 물 위로 떠올랐다“는 사실이 그나마도 다행이다. 그 직후 앳된 처녀의 시집 같은《옷고름 입에 물고》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종군위안부 15명의 증언집 내용이 일본군의 악랄했던 만행을 통해 우리 국민들의 가슴에 恨으로 응어리지게 했다.

오늘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소녀’를 형상화한 1.2m 높이의 <평화 비>를 제막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면서 “일본정부에 1965년 체결한 한일청구권 협정에는 종군위안부 피해자의 문제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응당 취해야 할 조처가 있다’며 성의 있는 후속조처를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정부의 처사는 정말 납득할 수 없다. 지금, “종군위안부 234명 중에서 171명이 숨지고 현재 63명만이 남았다”고 하니 정부가 “이들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비판은 어찌 감당할 것인가.

본 연합(이사장 최진호, 한림원 정회원)은 “이미 1993년 빈 세계인권회의 결의문에 위안부 문제가 포함됐고, 1998년 유엔인권소위원회가 일본에 위안부 문제의 조기해결을 권고하는 맥두걸 최종보고서를 환영한다는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으며. 2007년 미국의 마이크 혼다 민주당 의원 등 7명이 제출한 위안부 피해자 관련 결의안이 미 하원 본회의를 통과”했을 뿐만 아니라 지난 8월 30일. 헌법제판소가 “일본군 종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대일 배상청구권을 둘러싸고 한국정부가 구체적인 조처를 강구하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는데도 아직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정말, 납득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일본 종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조속한 피해 배상부터 처리하고, 그 다음 종군위안부에 대한 범죄 인정과 책임자의 처벌 등을 일본 정부에 조속히 처리해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출처 : 과학사링모임
[2011-12-14 16:22]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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