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야기

당일 개성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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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3일 5시에 기상, 집에서 6시에 출발하여 6시 30분 임진강역 주차장에 내렸다. 그리고 나서 셔틀버스로 남북출입사무소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개성관광객증을 받고, 주의사항을 듣고나서 개성으로 가는 관광버스에 올랐으나, 북측(그곳에선 북한을 이렇게 부른다.)의 통제로 9시경에 출발하였다.

군사분계선을 통과 북측 입경 수속을 받으니 이북 땅에 내린 듯하였다. 아 짧은 이 거리를 오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가. <금강산피격사건>을 보고서도 개성을 가는 것은 통일의 맥을 이으려는 작은 소망이 담겨 있고, 나의 어머니 고향이기도 해서다.
박연폭포로 가는 길. 초라한 집들과 옥수수밭이 펼쳐저 있었다. 편도길인데 마주치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1950년대의 우리농촌 모습이었다. 안내원에게 쌀농사는 짓지 않느냐고 물으니,
산악지대라서 쌀을 안 심는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쌀보다 옥수수가 수확량이 많기 때문인가 싶었다. 불쌍해 보이는 저 백성을 누가 살리어 낼 것인가.
박연폭포 주차장에 도착. 200미터 정도 오르니 높이 37미터의 폭포가 보인다. 황진이는 이곳을 서화담 그리고 자신을 일컬어 송도삼절이라 했으나..개성촌년 냄새가 났다. 이 정도의 폭포는 설악산에서도 볼 수 있으리오만..어제 비가 와서 인지 수량은 풍부하였다. 이곳에서 왕건릉이나 공민왕릉으로 이동하여 보면 좋을 것을 등산코스도 아닌 관음사를 보라는 주문이다.
댕그러니 부처 하나와 약수터, 조그만 사찰을 보기에 시간이 아까왔다. 천마산인가 이 곳 바위에는 시인 묵객의 흔적이 서려 있고 박연폭포에도 이름을 새기어 놓았다. 후세에 누가 알아 줄 이도 없는데..금강산과 마찬가지로 김일성 찬양구도 바위에 크게 새겨져 있었다. 금강산 기행 때 안 것이지만 그것을 지워버리는데 시간이 얼마 안든다고 한다.
박연폭포를 출발 개성시내를 들어서니 차가 보이지 않는다. 허름한 아파트, 활기 없는 사람들- 도대체 저들은 세계화의 지구촌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대학생도 보였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자주 눈에 띄었는데 그들의 운반수단인가 보다.
먹거리 문제, 걷기나 자전거 타기가 일상이 되어 있으니 비만한 사람을 볼 수 없었다. 이것이 축복인가보다 싶었다.
점심때가 되어 간곳이 민속여관내에 식당이다. 13첩 반상기를 내어 놓았는데, 놋그릇에 정갈하게 담겨져 있었다. 밥이 좋지 못하는 등 맛은 별로 였고, 약식은 어머니의 손끝과 같이 맛이 있었다. 민속여관은 관광객이 묵는 곳이나 문이 잠겨 있는 등 손님이 별로 없는 듯 싶었다. 500년 역사의 고도를 내팽기친 듯한 느낌이었다. 개성사람과의 완전한 단절. 북의 장막은 얼마나 지나야 벗어 날 것인가.
숭양서원, 선죽교, 표충비 등은 모두 정몽주를 기리는 곳이다. 개성을 정몽주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같다. 정몽주의 생가터를 개조하여 서당이 되었다가 선조때 사액된 숭양서원은 대원군때 서원철패에 남은 47서원의 하나란다. 선죽교, 이성계일파에게 철퇴에 피살된 곳- 죽은 곳에 피자욱이 남아 있었다.(일설에 따르면 김일성이 페인트칠을 하라고 했다한다.) 표충비는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영조와 고종이 각각 표충비를 하사했는데 비아래 기단으로 쓰인 거북바위가 엄청났다. 13톤이라나.
마지막 코스가 고려박물관. 기대를 하고 갔으나 초라하기 그지없다. 고려의 최고 학문기관인 성균관을 이용해 박물관으로 쓰고 있는데 허술하였다. 일제때 일본이 다 가져 갔는가.
공민왕 능안을 재현해 놨는데 초라하기 짝이 없고 일제때 도굴되어 엄청난 문화재를 잃었다는 해설자의 설명이다. 고려청자도 국보급은 아닌 듯 싶었고, 이제현의 묘석이 인상적이었다. 날씨가 무더워 야외 돌비석, 석등 등은 그저 지나쳤다. 1박은 해야 무언가 볼 수 있을 것같다.
박물관앞 상점에는 살거리가 별로 없었다. 아내가 고사리를 사자고 하여 10불을 주었다.
기념품인 셈이다. 그들의 공업능력으로 봐서 10년이 안되어 커다란 일이 벌어지리라 본다.
베일속에 불쌍한 백성들, 낙후된 거리, 후락한 문화재 그들에겐 통치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10년이면 그들은 밝은 세상으로 나오지 않으면 자멸할 것이다. 돌아오는 길속에서 나의 가슴에는 그리운 어머니만치 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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