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야기

박 희선(朴喜宣) 시인과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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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희선(朴喜宣) 시인과 인연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오래되어 이름도 기억에 없지만 안국동 로터리 한국 병원 쪽에 화랑(畵廊)과 거기에 딸린 조그만 찻집이 있었다. 나는 그때 그림에 대한 열정이 컸는데 그래서인지 전시회를 여기저기 다녔었다.
어느 날 그 찻집에서 K(그는 지금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화가가 되었다.)와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있었는데, 그때 우리 앞쪽에 점잖은 범상치 않게 보이는 분이 앉아 계셨는데, 잠시 후에 알게 되였고, 그 분은 박 희선 시인이셨다. 중년의 박 시인은 무언가 침묵 속에 있다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만날 분이 와서 나중에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박 시인은 자신의 시와 시집에 관해 말하였는데 어려워서인지 그리 감동적이지는 못하다고 느꼈었다. 그때 시에 대한 기억은 저편에 있고, 그가 한 말 중 시집을 말하시면서 '여학생은 이걸 사도 남학생은 안 살 거야.'라 한 말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 말이 사실 나에게는 기분 상하는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분의 예언(?)대로인지 나는 그 분의 시집을 사지 않았다.

그 이후 한참이나 지나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그를 다시 상기하게 된 것은 K와 참으로 기적적인 해후를 한 것에서 비롯되는데, 경복궁 화랑가를 지나다가 의 프랭카드를 보고, 이상한 느낌이 들어 때마침 H화랑을 들러 옛날의 K인지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날의 만남은 참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거기에서 K를 극적으로 보았고, 그의 전시회 전날로 전시를 위해 디스플레이 중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알고 보니 박 희선 시인의 아들 박 동(朴東)이 그의 여자 친구와 함께 K를 도와주기 위해 같이 있었던 것이다. K는 중년으로 달려가면서, 회화에서 우리의 천을 가지고 대형 작품을 만들고, 퍼포먼스도 하는 자기 세계를 구축하였다. 그에게 내 시집의 표지를 부탁하여 인상적인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어찌 예사로운 인연이라고 하랴.
박동은 후에 <동양의 용서>란 책을 펴내었는데 그의 폭넓은 시각을 느낄 수 있었고, 그가 운영하는 까페에도 자주 들렀다. 그래서 세상은 넓고도 좁다고나 할까. 기억하건대 그의 아버지 박 희선 시인은 고답적 선(禪)적 세계에 관심이 컸다면, 그는 민중 속으로 간 독특한 면모와 세계가 인상적이었다. 우연히 알게 되어 이대(二代)로 이어지니 인연은 소중하고, 기억은 새로운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한 번 만나던지 수없이 만나던지 인연의 끈질김이 있음을 헤아리며, 모든 사물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이겠으나 사람 만남의 귀함과 그 만남의 시간이 소중해야 함을 말하면 사족일까. 아, 이 살이의 고귀하고 신비함이여.
전(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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