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야기

구상 선생과 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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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21

구상(具常)선생과 세 시인





내가 시인 구상 선생님을 찾아 알게 된 것은 1973년 고등학교 1년 때였으니까 근 30년이 다 되어 간다. 명동 성당 앞 벤취에서 만나뵙거나 편지로 문학에의 열정을 보내곤 하였다. 선생님은 격려도 해주셨지만 앞날의 험난함도 말씀하신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사실 구상 선생님은 나이 차가 너무 컸었다. 그런 이유에서 어느 날 선생님은 세 시인의 이름을 적어주시며 이들을 찾아가 보라는 것이었다. 그 세 시인은 고은, 성 찬경, 박 희진 시인이었는데, 당시 박 희진 선생은 동성고 영어교사이셨고 대광고 근처 안암동쪽의 아파트에 홀로 사시었는데 그래서인지 그 댁을 자주 들락거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의 고답적 자세, 시 세계는 발길을 끊게 했다. 그와의 대화에서는 무엇을 배운다기보다는 억눌림을 당한 느낌이거나 홀로 지내는데서 오는 무사교의 어떤 느낌과 무덤덤함, 재미 없음을 많이 느끼었다. 그 오랜 후에도 한 두 번 구상 선생님 댁에서 뵈올 때도 있었지만 별 대화가 없었다.
그리고 2학년 때던가 고 은 선생을 버스 안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그의 치아(齒牙)에는 고춧가루가 그득한 모습으로 아마도 민음사에 기숙하던 시절로 보이는데, 몇 마디하자 "대학이나 가서 만나세." 하여 그를 찾지 않았다. 그의 지금 배부른 모습을 보면, 인간의 부침(浮沈)을 보는 것 같아, 깨달음은 난공불락의 성(城)으로 느끼고 있다.
성 찬경 선생은 내가 대성학원에서 재수할 때 이대반 강사라는 소식을 들었지만 왠지 찾아가 뵙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친구처럼 잘 대해주시는 구 상 선생님을 다시 찾게 되었고, 늘 나의 문학적 중심축으로 남으셨고, 늘 사모하고 존경하는 분으로 계신다. 선생님은 결혼의 주례와 시집의 서문도 써 주셨다. 잘 대해 드리지 못해 송구할 따름이다. 또한 선생님은 늘 나의 정신적 기둥이 되셔서 시(詩)아버지라고 부르고 있고, 서간을 올릴 때마다 '아버님'이라고 썼다. 지금도 그 분은 이 땅의 크신 시인으로 노벨상을 받을 유일한 한국 시인으로 굳게 믿고 있다. 오래 사시라, 그리고 당신의 <파우스트>를 완성하시길 간절히 기원하오니, 크신 선생님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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